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군 6진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 '''祖宗所守, 雖尺地寸土, 不可棄也''' > '''세종대왕: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촌토(尺地寸土)[* 한 자 땅과 한 뼘의 흙. 매우 작은 땅이라는 의미.]라도 버릴 수 없다.''' >----- >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popup/print.do?id=kda_11908006_003&gubun=kor|세종실록 78권, 세종 19년(1437년) 8월 6일 계해 3번째 기사]][* 실록에 따르면 당시 조정에서는 [[경원군|경원(慶源)]]을 용성(현 [[청진시]] 수성 일대)으로 물리면 북방의 방어 계책이 편리하고, 백성의 폐단이 다 없어지리라고 했는데, 이때 세종이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북방 개척의 의지를 드러냈다고 한다.] [[조선]] [[세종(조선)|세종]] 시기에 시행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이다.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태종 시절 4군 중 하나인 여연군이 설치되어 있었고, 6진 지역은 태조 시절에 정도전이 경원에 성을 쌓는 등 조선의 땅으로 분명하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다. 이후 [[고종]] 때 조선이 [[대한제국]]으로 개편한 후 중국이 혼란해 중앙권력이 만주에 안 닿는 틈을 타 두만강 북쪽 [[간도|한국인들이 사는 땅]]에 관리와 군사를 파견해 지배력 행사를 시도했다. 그러나 러일전쟁의 혼란기에 대부분의 방어진지가 무너져 버렸고,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게 국권이 피탈당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